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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계견사호도(鷄犬獅虎圖)

   계견사호는 닭, 개, 사자, 호랑이 등 4점을 한 세트로 그린 민화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동물들로 구성한 그림이다.   계견사호는 19세기 후반기 서울의 시전에서 가장 인기 있게 팔린 그림이지만 지금은 국내에 한 점도 전하지 않는다.   그 많던 계견사호는 모두 어디로 사라졌으며 19세기말에 조선을 방문하여 민화를 수집해 간 외국인들의 수집품에서 약 140년 전의 색감을 간직한 몇 점의 계견사호를 만날 수 있다.

계견사호
출처: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19세기 서울의 풍물을 읊은 <<한양가(漢陽歌)>>에 계견사호가 나온다.   다락벽에 붙이는 용도로 광통교 인근의 그림가게에서 팔렸다는 내용이다.   <<한양가>>는 19세기 중엽에 간행되었으므로 이 기록 속의 계견사호는 적어도 19세기 전반기의 시전에서 유행했음을 알려준다.   19세기말 프랑스의 인류학자 샤를 바라(Charies Varat, 1842~1893)가 수집한 <계견사호>가 현재 프랑스 국립 기매 동양박물관에 온전히 전한다.   이외에 미국인 버나도(J. B Bernadou, 1858~1908)의 수집품과 이탈리아 영사를 지낸 로제티(Carlo Rossetti, 1786~1948)의 수집품에서도 계견사호가 확인된다.

 

   그렇다면 계견사호는 어디에서 유래된 그림인지, 궁중회화와는 무관한 그림인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아직 완전하게 준비되지 않았지만, 계견사호 가운데 일부 동물은 새해 초 화원들이 그려 궁중에 올린 세화(歲畵)로 그려진 바 있고,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네 마리의 동물이 조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19세기 초에 간행된 김매순의 <<열양세시기(列陽歲時記)>>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도화서의 화원들이 궁중에 올린 세화 가운데 닭, 범 그림이 있는데, 닭과 호랑이 등이 세화로 한동안 그려졌고, 그 뒤에 개와 사자가 더해져 민간화가들이 그린 계견사호로 발전한 듯하다.   화원양식의 계견사호는 아직 확인되지 못했다.   애초에 민간화가들에 의해 생산 및 확산되면서 민간에 유행을 이룬 듯하다.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에 소장된 <<계견사호>>를 살펴보면, 닭(鷄)은 한 발로 땅을 딛고 선 측면의 모습을 그렸고, 배경이 간략히 들어가 있다.   이 그림을 일반화가가 그린 <닭> 그림과 비교해 보면, 형태를 단순화시킨 조형 능력과 색채의 구성에서 창의적 미감을 엿볼 수 있다.   탁월한 디자인 감각이 발휘된 이 그림은 민간화가들이 지닌 잠재적 역량을 잘 대변해 준다.   개(犬)는 앞발을 세우고 앉은 모습이다.  목에 줄목걸이와 장식품이 달려 있고, 오동나무가 함께 그려졌다.   사자(獅)는 네발로 선 동세에 부분적으로 화염문(火焰文)을 추가하였다.   사자를 해치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해치가 되려면 반드시 머리에 뿔이 그려져야 한다.   또한 계견사호의 용어에 사(獅) 자가 들어 있으니, 그려진 그림은 사자가 분명하다.   호랑이(虎)는 네발로 딛고 섰으며, 배경에 소나무를 그렸다.   그런데 까치는 그리지 않았다.   계견사호의 호랑이는 19세기에 유행한 까치호랑이와 계통이 다른 그림으로 이해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춘첩(春帖)에는 "닭 울음소리에 새해의 덕이 들어오고, 개 짖는 소리에 묵은해의 재앙이 나간다."라는 글귀가 있다.  닭은 새해를 밝히는 덕(德)의 의미가 있고, 개는 지난 한 해의 재액을 말끔히 내보낸다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닭과 개가 조합된 이런 의미의 도상은 세화로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19세기말 계견사호도는 서울뿐만 아니라 경기도 일대에서도 집안의 생활공간을 꾸미는 용도로 활용되었다.   그 한 사례가 중인 신분의 지규식(池圭植, 1851~ ?)이 남긴 <<하재일기(荷齋日記)>>에 나온다.   지규식은 분원(分院)에서 만든 각종 그릇을 관청에 납품하는 상인이었다.   그가 서울에 쓴 1891년 7월의 일기에는 경기도 이천에 사는 친구 이천유(李天裕)로부터 받은 편지 한 통을 짧게 옮겨 놓았다.   내용은 두꺼운 장판지와 계견사호 그림을 서울에서 구하여 이천으로 보내달라는 부탁이었다.   계견사호가 서울 이외에도 널리 유행하였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장판지와 함께 부탁한 점을 보면, 집을 새로 짓거나 도배를 다시 한 뒤 벽장문 등에 붙이고자 한 것으로 짐작된다.

 

   계견사호는 19세기 말 외국인들이 수집하여 본국으로 가져갔기에 지금까지 온전히 보전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계견사호가 국내에는 왜 전하지 않을까, 이유는 가옥의 벽면에 붙여 생활 장식화로 쓰였기에 보존에 취약하였고, 오래 전해질 수 없었다.   바람과 먼지, 햇빛으로 인해 색이 바래게 되면 그대로 떼내거나 다른 그림을 그 위에 덮어서 대체하였다.   19세기 중 후반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서울의 시전에서 꾸준히 팔렸던 그림이다.   길상의 의미를 전하면서도 생활공간을 꾸몄던 기능은 대중들이 이 그림을 선호한 가장 큰 이유였다.   19세기말 버나도 등의 외국인들이 계견사호를 수집하지 않았다면, 약 140년 전 세간의 인기를 끌었던 민화 계견사호는 이름만 전하며 상상으로 떠올려야 하는 그림으로 남았을 것이다.

 

 

 

 

 

 

참고문헌

1. 윤진영, <<민화의 시대>>, 디자인밈,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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