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화(歲畵)는 신년 초에 새해를 송축하며 덕담처럼 주고받았던 그림을 말한다. 세화는 나쁜 액운을 막아주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기능을 했으며, 새해 초에 대문이나 실내외 벽에 붙여서 소망을 빌었던 세시 풍속 중의 하나이다. 세화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 말 학자이며 관료였던 이색(李穡, 1328~1396)의 문집에 <세화십장생(歲畵十長生)>이라는 시에 세화로 그려진 십장생도의 존재를 알려준다. 이후 세화는 조선 초기부터 활발히 제작되었는데, 민간보다 궁중에서 제작하고 상당한 수효를 소비하였다. 도화서 화원들이 세화를 그려 올리면 임금이 이를 신하들과 외척들에게 하사하는 것이 관행처럼 지속되었다. 세화를 민화에 포함시킨다면 민화 가운데 가장 역사가 긴 그림이 된다. 세화가 새롭게 조명받던 19세기에 한정하여 관련 기록과 그림의 사례는 <<육전조례>>에서 살펴볼 수 있다.
19세기 중엽 관가의 행정법규를 정리한 <<육전조례(六典條例)>>(1867)에는 도화서 화원들의 임무 가운데 하나를 '진상(進上)'으로 명시했다. 진상은 진귀한 물건을 바친다는 뜻인데, 화원들이 궁중에 바칠 수 있는 것은 단연 그림일 것이다. 이 '진상'조에는 화원들이 그려서 올린 그림을 '세화(歲畵)와 '문배양재(門排禳災)'로 구분했다. 세화란 앞에서 설명했지만, 문배양재의 '문배'는 붙인다는 뜻이고, '양재'는 나쁜 기운인 재액을 떨쳐낸다는 뜻이다. 문배양재란 사악한 기운을 막기위해 문 위에 붙였던 그림을 말한다. 문배를 양재와 함께 붙여서 부르는 것은 문배 그림이 지닌 벽사(闢邪)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명칭으로 본다면 문배양재 뒤에 그림 도(圖) 자를 붙여 문배양재도라 한다.
세화와 문배양재를 그릴 화원, 그려야 할 수량, 올리는 날짜가 규정되어 있다. 여기에 명시된 세화는 병풍형식은 아니였다. 낱장의 단위로 수량을 제시했기에 단 폭에 그린 그림이 분명하다. 세화는 기본적으로 차비대령화원이나 도화서 화원이 그렸고, 문배양재는 도화서의 장무관(掌務官)과 화원들이 맡았다고 한다. 장무관은 화원들을 선발하고 감독하는 경력직 화원이다. 세화는 여러 장을 그려야 했으며, 대체로 화원들의 솜씨가 발휘된 그림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그린 문배양재 그림은 현재까지 확인된 사례가 거의 없다. 매년 12월이면 상당히 많은 분량의 세화와 문배양재가 그려졌다. 세화의 경우 차비대령화원 10명이 1인당 30장씩 그렸다고 하니 합하면 300장이 된다. 화원 30명이 1인당 20장씩 그린다면 600장이나 되니 방대한 분량이다.
왕실에 올리는 세화는 왕이 종친과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고, 세화를 하사 받은 사람들은 이 그림을 길상(吉祥)과 벽사(闢邪)의 용도로 활용하고자 집안의 문이나 벽에 붙였다. 선물 받은 세화는 이렇게 민간의 생활 공간 안으로 들어왔고, 궁중의 세화가 민간으로 전해져 민간그림으로 확산되어 궁중회화의 저변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세화에 관한 문헌 기록을 찾아보면 김매순(金邁淳, 1776~1840) <<열양세시기(列陽歲時記)>>(1819), "세시(歲時)에 도화서에서는 세화(歲畵)를 그려 올린다. 금갑신장(金甲神將)을 그린 것은 궁전 대문에 붙이고, 신선을 그린 그림이나 닭, 범을 그린 그림은 벽에다 마주 붙인다. 혹 친척이나 가까운 신하 등에게 하사하기도 한다.". 금갑신장(金甲神將)이란 금빛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건장한 장수의 형태로 추정된다. 보는 사람들을 압도하는 위압적인 이미지로 인해 대문에 붙여져 벽사의 기능을 했던 그림 일 것이다. 최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는 미국 잡지인 '더미레스츠 패밀리 매거진(Demorest's Family Magazine)' 1893년 7월호에 광화문에 금갑신장이 걸렸던 문배그림에 대한 한 장의 사진을 볼 수가 있다. 잡지에 실린 사진은 워싱턴 DC 소재 주미 대한제국공사관의 내부를 촬영한 것인데, 그 사진 속에 구한말에 광화문을 촬영하여 액자에 놓은 사진이 걸려 있었고, 그 액자에 든 사진의 원본을 최근에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1882년에 촬영한 것인데, 놀랍게도 광화문에 걸린 문배도 두 점의 윤곽이 어렴풋이 드러나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미국의회도서관과 소장 사진 속의 가장 유사한 사례를 안동 회화마을의 풍산류 씨 고택인 화경당(和儆堂)에 전하는 문배도에서 찾았다. 이를 모본으로 한 복제본을 만들어 얼마 전 광화문에 걸어 재현하였다. 1882년 광화문에 문배도가 붙여진 이후 약 110년 만에 같은 형식의 문배도를 붙인 것이다.
화경당 고택의 문배도는 광화문에 붙인 문배도와 매우 흡사하다. 문배도의 크기는 세로 168cm, 가로 77cm로 상당히 큰 편이다. 금갑신장은 먹선으로 형태를 그은 뒤, 노랑 적색, 초록, 검은색, 회색 등 오방색으로 채색하였다. 아마도 하나의 밑그림을 두고 대량 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금갑신장>의 모습은 복잡한 형태로 그렸지만, 선만 긋고 나면 채색은 난이도가 그리 높지 않다. 실제로 이런 크기와 형식의 문배도는 새해 초에 임금이 신하들에게 나누어준 실물 세화의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택의 문배도는 아마도 관직을 지낸 이 집안의 인물 가운데 누군가가 임금이 궁궐에서 반사하는 세화를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정조 대에 규장각 초계문신을 지낸 류이좌(1763~1837)와 그의 손자인 류도성(柳道性, 1823~1906)이 유력하다.
참고문헌
1. 윤진영, <<민화의 시대>>, 디자인밈, 2022
'문화 예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전통색채와 색채의식 (0) | 2024.08.12 |
---|---|
계견사호도(鷄犬獅虎圖) (2) | 2024.08.05 |
산수도(山水圖) (1) | 2024.07.30 |
도석화(道釋畵) (0) | 2024.07.30 |
풍속도(風俗圖) (0) | 2024.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