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재 윤두서(尹斗緖:1668~1715)는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로 잘 알려진 윤선도의 증손자로 현재 심사정(沁師正), 겸재 정선(鄭敾)과 함께 삼재(三齋)로 일컬어진다. 당시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남인(南人) 출신으로, 당쟁이 심해지자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예술에 전념하였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난 윤두서는 과거 준비를 하였으나, 당쟁으로 셋째 형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자신도 모함을 받고 절친했던 이 잠(李潛)마저 죽음을 당하게 되어 관직보다는 학문과 예술에 몰두했다. 윤두서는 천문학, 군사항 등의 지식을 갖추었고,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 풍속화 등 그림에도 능했다. 정확하게 대상을 관찰하여 묘사하는 말그림과 인물화에 뛰어났으며 조선후기 회화를 새롭게 바꾼 선구자로 평가된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본인의 얼굴을 상당히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당시 조선의 초상화는 인물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이상적인 묘사를 중시했지만, 윤두서의 자화상은 이런 형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으려 했다. 정면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강렬한 눈빛이다. 이 눈빛은 그의 지적(知的) 깊이와 내면세계를 표현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해석된다. 인위적인 장식이나 꾸밈이 없고 얼굴의 주름과 수염 등의 묘사도 매우 자연스럽다. 한 때 이 그림은 상반신 없이 얼굴만 그린 것으로, 심지어 귀도 그리지 않은 독특한 작품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도포를 그린 흔적이 남아있으며 양쪽 귀도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최근에 적외선 촬영을 통해 종이 뒷면에서 옷 주름을 그렸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 작품은 후손이 보관하고 있으며 실제로 볼 기회가 많지 않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조선시대 예술이 가진 전통적인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을 깊이 탐구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로 인해 조선 후기의 초상화나 자화상 중에서도 매우 독창적인 작품으로 남아있다. 윤두서는 서울에서 거주하다 46세에 해남에 귀향하였고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현재 그가 살던 녹우당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그가 공부하던 수많은 책과 다양한 그림이 보관되어 있다.
참고문헌
1) 조인수, <<군자의 삶, 그림으로 매우다>>, 다렛수레,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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